도구, 시차, 미완: 이미지를 읽는 세 개의 키워드



이준영


어떤 작품들은 평면이나 이미지라는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 다른 접근방식을 취한다. 최지원, 서제만 작가의 작품 또한 판화와 회화라는 매체 간의 단순한 차이를 넘어 작업의 동기, 과정에서의 사유, 감각적인 결과물의 차원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차이를 ‘도구, 시차, 미완’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두 작가는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구를 중심으로 사유하고, 시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며, 완결과 미완에 대한 감각을 특유의 방식으로 활용한다. 이 키워드 중에서도 특히 ‘미완’이라는 단어에 통념 상 존재하는 부정적인 느낌을 걷어낸 후 두 작가의 작품을 보았을 때, ‘완결’이 갖는 닫힌 가능성에 대해 역으로 고찰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분할되고 겹쳐지는 얇은 이미지: 최지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선적이며 동시에 양적이다. 즉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 7일로 분할된 한 주와 24시간으로 분할된 하루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술에서는 지금까지 이 시간에 대한 관념을 의심하거나 전복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어왔으며, 시간에 대한 사유는 일반적으로 시간에 대한 주관적인 감각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최지원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독특한 지점은 오히려 기존에 존재하는 프레임을 받아들인 채로 시작점을 설정한다는 데 있다. “내가 인식하는 세계관이란 일정하게 할당된 구조 위에 여러 가지를 덧붙임으로써 재편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용의 태도는 작가라면 반드시 기성의 틀을 깨고 벗어나야 한다는 것 또한 이미 하나의 정해진 원칙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최지원의 작가 노트에는 “레이어”, “템플릿”, “백업”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어도비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디자인 프로그램을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디자인 프로그램을 어릴 때부터 상시로 활용하며 작업해온 1990년대 작가들에게 있어 복사 및 붙여넣기(Ctrl+C & Ctrl+V), 실행취소(Ctrl+Z)는 공유된 방법론에서 나아가 정서, 사고방식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 개별적인 그래픽 요소는 1초 만에 자르고 복사하고 붙여 넣어지는데, 이 간편한 과정은 그저 작가의 작업 시간을 단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즉 최종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최종 결과물에서도 디지털 파일 특유의 반복적인 요소,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완’의 속성이 적용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미완이란 작품이나 전시의 완성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수정 가능성을 의미한다.
최지원 작가는 실크스크린을 주 매체로 사용하지만, 개별적인 그래픽 유닛의 복사와 중첩, 이미지의 복제와 변주에서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 편집과 판화 간의 공통점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Row Row Row Your Boat〉(2022) 시리즈에서 구름, 나무, 야트막한 언덕은 고정된 유닛으로 존재하며 7개의 이미지 위에서 색상과 위치, 개수의 조합만이 변주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각 유닛을 스티커로 제작하여 임의로 원하는 곳에 물리적으로 ‘붙여넣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특징은 〈PPPPPPPost-it〉(2022)과 같이 정형화된 기하학적 규격을 가진 포스트잇, 동그라미 스티커 등의 기성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미완’의 느낌은 액자를 씌우지 않은 종이를 그대로 벽에 부착하거나 공중에 거는 식의 전시 방식을 통해 강화되며, 유닛의 조합을 통해 변주된 이미지를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전시 방식은 파일을 여러 버전으로 복제하여 편집하는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Row Row Row Your Boat〉은 가로로 긴 언덕의 형태를 하나의 기본 레이어(base layer)로 삼고 그것을 일주일과 같이 7개의 ‘레이어’로 분할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 하나의 시리즈는 하루가 흐르는 것을 보여주듯 해가 뜨고 지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마지막 7번째 이미지는 1번과 접해 있으면 언덕의 모양이 연결되며 다시 시간의 순환을 드러내 보인다. 이렇듯 시리즈를 어떻게 배치하고 보여주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개별 이미지 속 유닛의 배치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계단에 놓인 것들(Layers)〉(2020) 시리즈는 실을 사용하여 종이를 벽으로부터 띄우고 그림자가 지도록 전시하였는데, 이러한 전시 방식은 최종 결과물의 가볍고 얇은 속성을 드러내 보이며 유닛의 레이어가 아무리 많이 겹쳐졌어도 물리적인 두께가 생기지 않는 디지털 이미지와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종이에 찍어낸 이미지를 액자에 넣지 않고 벽에 그대로 전시하는 방식은 액자에 들어감으로써 완결되기보다는 완성을 무한히 유예하는 듯하다. 액자가 없는 그의 작업은 마치 디자이너들의 컴퓨터에 쌓여 있는 숱한 ‘.ai’, ‘.pdf’ 확장자 파일들처럼 부유하다가도 문득 ‘내보내지는(export)’ 시안이 된다. 마치 하나의 기본 파일에서 여러 개의 시안이 파생되듯, 개별 이미지는 정해져 있는 유닛의 조합을 통해 독립적으로 구성되지만 서로 유사성을 띠거나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일상은 매일 비슷한 일이나 사건들의 조합과 변주로 이루어져 있고, 하루하루는 그 조합 때문에 비슷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변주로 인해 서로 다르다. 유닛이 모여 이미지를 이루고, 이미지가 모여 시리즈를 이루는 최지원 작가의 작업은 이 일상 속 시간의 흐름을 감각적이면서도 구조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건조하고 유연한 움직임과 사건의 세계: 서제만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과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서제만 작가의 화면은 일종의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모든 움직임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불리지는 않으며, 또한 반드시 객관적인 중요성이 있는 움직임만이 사건이 되지는 않는다. 서제만 작가의 회화는 화면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러한 사건 혹은 움직임을 체현하고 소화한 작가의 움직임이 남긴 흔적을 담고 있으며, 화면은 그 자체로 외부 사건과 연관되어있으면서도 독립적인 사건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서의 회화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아무것도 없는 빈 캔버스는 유명한 화가들에게도 종종 두려움의 대상이어왔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빈 캔버스에 물감을 무작위적으로 집어 던지거나 먼지를 붙였듯 화가들이 빈 캔버스를 마주하고 처음으로 하는 행위는 다양하다. 서제만 작가의 경우 연필과 목탄, 색연필, 오일 파스텔 등의 건재료를 먼저 사용한다. “건재료는 화면을 다소 비권위적이고 유연하게 만드는 첫 단계로, 회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낙서장이나 드로잉북을 맞닥뜨리는 상태가 되게 돕는다. 캔버스라는 크고 단단하고 두려운 매체를 중화시킨다.” 이 건조함을 통해 ‘유연’해진 화면은 비로소 물질적으로 유연한 재료인 유화물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이렇듯 서제만 작가의 작업에서 특징적인 점 중 하나는 한 화면 안에서 이질적인 재료를 혼용한다는 점이다. 축축한 재료와 건조한 재료, 색이 있는 재료와 무채색의 재료가 동시에 쓰이는데, 이러한 재료의 다양함은 전체 화면의 시각적 효과와 복잡성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재료의 물질적인 차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성질이 다른 재료는 겹쳐지며 전체적인 화면에서는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일부분을 가까이서 보면 서로 충돌하고 미끄러진 흔적을 관찰할 수 있다. 흑연이 먼저 그어진 곳 위에 지나간 오일 파스텔과 유화물감은 물질의 성질로 인해 일부는 겹치고 일부는 비껴나가는데, 이러한 재료 간의 충돌은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작가의 움직임을 유추해볼 수 있게끔 한다. 또한 건재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핸디코트와 같은 건축 재료의 활용으로까지 이어지는데, 포장을 풀 때마다 부스러져 회화를 보존하기에는 용이하지 않은 결과물이 탄생하기도 한다. 3차원 건축물의 견고함을 위해서는 좋은 재료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용도를 벗어난 2차원 캔버스 위에서는 미술 재료에 비해 취약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버스를 덮은 핸디코트는 특유의 건조함을 통해 연필이 지나가는 길을 가로막으며 힘의 흔적을 뚜렷이 남긴다.
‘움직임’에 대한 작가의 집중은 제목에서 활용된 ‘호(arc)’, ‘기둥(pillar)’ ‘아치형의(arched)’ 등 기하학적인 요소를 연상시키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공통적으로 둥근 선이나 형태를 표현하는 단어가 쓰이는데, 〈호처럼 슬리더링(Slithering like an Arc)〉(2022)에서는 화면 위 운동감 있는 선들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몇몇 부분에서 구상적인 형상이 떠오르는 듯하다가도 이내 선으로 모두 흩어진다. 한편 〈궁륭의 여섯 기둥(Six Pillars of the Vault)〉(2022)에서는 제목이 암시하듯 닫혀 있는 검은색 윤곽선들과 그 윤곽선을 채우는 여러 색상의 면들로부터 어떤 형상이 떠오를 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은 색면들은 이질적인 색의 선에 의해 침투당하며 완결된 형상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회화를 완성시키는 ‘완결된 움직임’은 무엇이며, 사건은 이 완결된 움직임을 통해 규정되는 것일까? 물론 최종적인 회화 이미지는 어느 시점에서 그리는 행위의 멈춤을 전제하지만, 서제만 작가의 화면 속 역동적인 선과 엷은 면으로부터는 쉽사리 이러한 완결의 감각을 느끼기 어렵다. 〈만신전(10,000 Beings House)〉(2021)과 같이 종이에 그린 작품뿐만 아니라 캔버스에 그린 〈변신의 과도기에 이르러〉(2022)를 비롯한 몇몇 작품에서는 화면 위에 흰 물감이 아니라 흰 여백이 자리 잡고 있다. 드로잉이 검은 선과 면 바깥 흰 여백의 존재를 통해 성립할 수 있듯, 서제만 작가의 구부러진 선과 흐릿한 면이 구성하는 화면은 회화와 드로잉 사이에 존재하며 완성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움직임, ‘미완’일 수밖에 없는 사건의 세계를 드러낸다. 작가가 어린 시절 묻어둔 기억이 평면에 제스처, 혹은 “제스처의 그림자 같은 것”으로 다시 떠오르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객관적으로는 종결되었지만, 작가의 내면에서는 완결되지 되지 않은 기억과 사건은 후에 만들어지는 이미지와의 관계 안에서 계속하여 시차를 발생시킨다. 이 시차를 통해 서제만 작가는 화면에 건조하고 유연한 움직임과 사건을 생생하게 발생시키며, “중력이 없는 어떤 환영인 상태에서 진행되는 어설픈 세계”를 구축해낸다.